쿠사마 야요이
<좌- 연희동 지오영 건물1층 / 우- 서촌 진갤러리>
집 근처 건물 1층에서 우연히 발견. 이런 게 있었었나? 언제부터? 의식하지 않으면 눈에 보인다고 다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은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뿐은 아닌가 하노라~! 서촌에서 본 노랑 호박도 생각나면서 혹시나 하고 검색해보니~!
<사진- APAP 홈페이지 - 평촌, 학운공원 부흥동 1104-2 평화공원 내(상가 옆)>
안양 평촌 평화공원에서도 볼 수 있네요. APAP(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ANYANG PUBLIC ART PROJECT)에서 쿠사마 스튜디오의 스태프가 “헬로, 안양 위드 러브(안녕, 사랑이 넘치는 안양)”의 테마로 APAP와 관계를 맺으며, 여러 차례 안양을 방문, 작품을 설치하는데 있어서 지반이 약한지 등등 꼼꼼히 체크 후, 쿠사마 야요이 의 시와 함께 작품의 설계도를 전달받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의기소침했을 때,
다양한 색으로 밝게 빛나는 다섯 마리의 강아지들과
나는 꿈나라와 같은 안양에 왔습니다.
원색에 강열하고 파격적인 쿠사마 작품에 비하면 뭔가 올망졸망 소프트하고 귀여운 게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이 참에 본격적으로 정리를 해보자면~!
집중탐구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YAYOI KUSAMA
(1) 어릴 때 꽃밭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꽃들이 말을 걸어왔다는, 일찍이 남다른 정신세계의 소유자로, 착란증, 정신분열증(스키조프레니아), 강박관념, 자살충동 등의 정신병에 시달리어,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YAYOI KUSAMA / 1929년 3월 22일 일본 나가노현).
어린 쿠사마 야요이의 눈에 비춰지는 세계는 물방울과 그물로 덮여있었고, 그러한 환상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방탕한 아버지 때문에 화난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일화도 있네요.
<좌-일본 NAVER MATOME 우-1939년 “무제” 쿠사마 야요이>
(2) 1948년 쿄토시립미술공예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 두 번의 개인전을 끝내고 해외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 한 행동이 프랑스 르데 코티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
”私は貴国のフランスがどんな国か観たいと考えているので、よろしく頼みます”
“저는 당신의 나라인 프랑스가 어떤 곳인지 알고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 것도 대단한데, 친절한 답장까지 받게 되네요.
”フランス語をよく勉強して日仏交流機関の試験を受けなさい”
“프랑스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본-프랑스 교류기관의 시험을 보세요”
그러나 프랑스어라는 높은 벽에 부딪혀, 미국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한 어느 날, 어느 중고서점에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화집을 발견하게 됩니다.
“私がもしアメリカに行ったら、この人が助けてくれるかもしれないと思った”
“내가 미국에 가면 이 화가가 날 도와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나고야현 마츠모토시)에서 6시간 걸려 도쿄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달려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의 주소를 알아내어 자신의 수채화 몇 점과 함께 “또” 편지를~!
당시 일류화가였던 오키프는 놀랍게도 답장을 주고 그때부터 패전국의 무명 작가지망생과의 팬팔이 시작됩니다. 팬팔.. 참 오랜만에 써보는 단어;;
<DAUM 이미지 검색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
그러던 중에 “이 나라에서 화가로 먹고 살기는 힘들다….그렇지만....” 라는 문장에 힘을 얻어 드디어 미국행~! 그 이후로 오키프는 쿠사마가 경제적으로 어려울때 아트딜러가 되어 작품을 사주기도 하면서 든든한 후원자가 됩니다. 오키프가 현안을 갖고 있었는지~ 현재 생존 화가 중에 최고라고 말 할 수 있는 작가를 진작에 알아본 건가요~
참고로 당시 일본에서 미국행은 쉽지 않았으나, 우선 보증인을 찾기 위해 친척 중에 전 국무대신의 도움을 받고, 100만엔(당시 집 몇 채 값)을 환전하여 종잣돈을 준비하여, 그간 작업한 2000점의 작품을 가지고 나이 만 28세의 나이로 미국행에 성공합니다. 밀어부치는 행동력과 부잣집 딸이었던 금수저 배경도 무시 못할 이유네요.
(3) 1957년 말 뉴욕에서의 생활이 시작되고 1959년 뉴욕 갤러리 첫 개인전에서 호평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회화, 조각, 퍼포먼스 등 폭넓은 활동을 10여년간 하게 되는데…
<좌-無限の網(무한네트Infinity Nets 1959 ) 우-無限の網イエロー(무한네트옐로우 Infinity Nets yellow 1960)>
1966년 33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 ‘나르시스 정원’ Narcissus Garden’ 라는 설치미술작업에 기모노차림으로 2달러(1200리라) 에 미러볼을 팔다가 주최측에 의해 중지된 일화가 있는데, 쿠사마 야요이 작품중에 가장 악명높은 작품으로 불립니다. 미술시장의 상품화와 기계화(대량생산화)의 도발이라는 비평이었지만, 당시 메스컴을 통해서 유럽으로 자신을 알리기 위한 프로모션 활동전략이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 전위예술에 영향을 받은 행동력 짱인 쿠사마는 역시 센트럴파크, 부르클린 브리지 등에서 누드 퍼포먼스로서 월남전 저항운동의 중심에 섭니다. 오노 요코도 쿠사마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네요. 히피족들의 전쟁 저항운동 나체데모에 물방울무늬의 바디페인팅을 하고, 패션쇼에 참가하고, 실험영화를 찍어 벨기에 영화제 수상하는 등, 화려한 스펙타클 작업에 과로로 자주 입원해야 했던 “열정”의 소유자.
(4) 그런 열정의 소유자도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로 뉴욕에서의 생활을 접게 됩니다. 1973년 일본으로 귀국후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 하다가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을 선택합니다. 전에 비하면 다소 소극적이지만 끊임없는 미술활동과 소설, 시집, 자서전 등 책을 출간하면 지내면서 80년대를 끝내고,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로 개인전, 199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 개인전과 쿠사마를 잊었던 뉴욕에서는 회고전이 열리는 등 쿠사마 야요이 제 2막이 열립니다.
<좌-쿠사마의 유일한 미소는 사랑하는 이(조셉코넬-예술가) 와 함께 있는 사진에서만>
<중-무라카미 류 감독의 영화에도 출연>
<우-2012년 자서전 無限の網(무한네트Infinity Nets)>
1994년부터 옥외 조각을 시작하여, 후쿠오카 칸코센타, 후쿠오카 미술관, 나오시마 분카무라, 마츠모토시 미술관(나가노현) 등에서 호박시리즈 등 유명한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좌- 카가와현 나오시마 관광사이트 http://www.naoshima.net/art/art_miyanoura/#c09>
<우- 나가노현 마츠시마시립미술관 http://matsumoto-artmuse.jp/>
그 외 패션업계에서의 쿠사마 야요이 콜라보.
<좌-2013년 12월 W메거진 표지-조르지오 아르마니-조지클루니>
<중-2012년 7월 일본 도쿄 이세탄백화점 신주쿠점 루이비통×쿠사마 야요이 SHOP>
<우-2016년 4월 일본 유니클로에서 구입한 콜라보 티셔츠^^V>
1929년생으로 올해 88세, 1977년부터 지금까지 공황장애(恐慌性障害.パニック障害)를 앓으면서 도쿄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병원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작업 활동 중인 쿠사마 야요이.
그림에 몰두할 때는 공황장애 증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쿠사마 스튜디오에는 스태프 8명이 있어 쿠사마가 그린 그림을 밑그림으로 이후 과정을 서포트합니다. 그 중에 25년간 스튜디오 디렉터로 같이 활동중인 한 명을 양자로 들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을 다 하려면 300살까지는 살아있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이 시대의 한가지 문화 아이콘이기도 한 열정적인 활동가 쿠사마를 보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하네요^^*
올 봄에 도쿄에 갈 일이 있다면 도쿄 롯봉기에 있는 일본국립현대미술관으로~!
장소: 일본국립현대미술관 (도쿄 롯봉기) http://www.nact.jp/
전시: 草間彌生 わが永遠の魂 (YAYOI KUSAMA: My Eternal Soul)
일정: 2017년 2월 22일~ 5월 22일 (매주 화요일 휴관) / 입장료 1600엔